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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본문
뉴욕 MoMA(2011), 런던 테이트모던(2009, 2015), 파리 퐁피두센터(2017)등에서는 자주 소개가 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 하룬파로키의 이름을 단독으로 내건 이정도 규모의 회고전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가야지 가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가 전시 끝나기 직전에 겨우 왔고, 포스트 올려야지 올려야지 마음만 먹다가 '조금씩이라도 작성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이제서야 올렸다.
아무래도 나는 영화나 비디오아트에 크게 관심이 없다보니 하룬 파로키라는 이름을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들었다. 게다가 현대 예술에 대한 지식도 기본적인 상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보니, 전시회 관람 이후에도 공부를 위해 이것 저것 찾아보느라 포스트 작성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살면서 이 글 하나 쓰겠다고 벤야민의 1차 서적을 읽게 될 줄이야...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하로키의 철학과 이를 관통하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개략적으로만 겨우 이해를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고.
아무튼간, 국현 대체 몇년만이냐. 영상 전시라 촬영은 당연히 불가.
"파로키에게 소프트 몽타주는 이미지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이미지에 기입된 역사와 권력의 흔적, 서로 무관해보이는 사회적 체계나 장치의 연관성을 탐구해온 에세이 영화 방법론을 미디어 설치작품으로 이전하기 위한 명령어였다." / 김지훈
비디오 아트에서 비디오는 양식이 아니라 매체다. 따라서 비디오 아트는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타난다. 바로 비디오 영상과 설치비디오. 먼저, 설치비디오(혹은 비디오 조각Video Sculpture)는 비디오 장비, 주로 단일, 혹은 복수의 수상기를 이용한 설치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백남준의 작품이 대표적으로, 그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설치비디오는 비디오를 새로운 매체로 파악한다기보다는 설치물 그 자체로서 조각의 성격이 강하다.
반대로 비디오영상은 비디오 아트의 '내용'을 만드는 것에 더 주목한다. 다큐멘터리 이미지 혹은 실험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비디오 아트'의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야가 바로 비디오 영상.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는 비디오 영상 작업을 중심으로 하되 그것을 설치 형식으로 제시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이러한 비디오 아트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이번 회고전의 주인공인 하룬 파로키(1944~2014)다.
영화나 비디오아트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는 한 파로키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하룬 파로키는 '미지의 유명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그는 영화와 비디오아트를 통해 노동, 전쟁, 기술 발전의 이면과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추적해온 영화감독,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비평가. 이번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파로키는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의 작동방식과 소외된 노동의 실재를 본인만의 영상 몽타주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영상 몽타주를 그는 '소프트 몽타주Soft Montage'라고 불렀는데, 이는 '기승전결'의 시나리오로 구성된 기존의 영상 서사를 거부하고, 마치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처럼 전세계의 수많은 전쟁, 노동 현장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의미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현대 사회의 사회 정치적 문제와 인간의 노동행위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숙고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파로키가 창안하는 몽타주는 확정적인 의미의 영역에 안착하지 않고 친숙함과 낯섦,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혼합된 형태를 이룬다. 다시 말해 파로키에게 두 이미지의 결합이란 연결과 절단을 결합하는 역설적인 원리이다.
그는 테크놀로지와 산업, 전쟁과 산업 등 문화의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남아있는 각종 이미지들의 자료를 찾아내고 분석한다. 그리하여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고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지를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은『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카프카를 잘못 해석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보였다. '자연적'이라 부르는 심리 분석적 방법과 '초자연적'이라 부르는 신학적 방법이 바로 그것. 예를 들어『실종자』는 주인공의 현실을 성서의 '신화'에 내재된 소속과 추방의 구조로서 나타내었으며,『성』'의 성은 신의 은총이 자리잡은 곳,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의 영역을 그리려 했던 것이고, 『소송』의 법정 세계 역시 전자의 장소를 세속적으로 번안하여 묘사한 것이라는 식이다.
미술평론가 곽영빈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파로키의 작품을 바라보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시 초반의 <평행> 시리즈가 그저 가상현실의 발전과정을 계보적으로 설명하는 영상이 아니라면? <노동의 싱글 숏>시리즈가 세상의 다양한 직업들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각 시대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연대기적으로 모아 다수의 채널로 보여주는게 아니라면? 혹은 아프리카와 인도 노동자의 날것의 노동과 기계, 그리고 체제와 만난 유럽 노동자들의 노동을 번갈아 보여주는 <비교>가 개도국과 선진국간의 기술력 차이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면?
파로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첫 걸음은 바로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감상과 생각들이 '공회전'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동과 퇴근 장면의 교차 제시는 강렬한 낙차의 심상을 이끌어 내며, 무리를 이룬 노동자들이 암시하듯 노동이 집단적이라는 사실을, 일이 끝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나아가 노동을 수행한다는 것이 갖는 함의를 희미하게나마 지시하려 한다. 이는 비록 워크샵 형식의 프로젝트에서 도출된 클립들로 이뤄진 작업이지만, ‘무언가 생산되는 곳’에 대한 파로키 특유의 관심을 가장 솔직한 형태로 보여주는 미덕이 있다.
현대 예술의 주된 특징은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작품 속에서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의도적인 거리를 두고(소격 효과라던가), 관객의 감상과 태도에 작품이 개입하고, 의도된 혼란을 만들어 작품에 개념을 무너뜨리는 거라지.
그렇기 때문에 현대 예술을 전시하는 공간은 관람객들에게 부담스러운 공간이 된다. 이곳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요구하고, 현대 예술을 왜 이해하지 못하냐고 끊임없이 추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현대 예술이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가 제시된 '맥락'이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고, 그 맥락을 파악하는 수고를 관객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예술이라 생각을 했고, 사실은 지금도 그 생각을 다 버리진 않았다.
아무튼 비디오아트와 현대 미술에 대한 잘못 알고 있던 생각들을 다시 공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디오 아트=설치 비디오' 라고만 생각해왔던 내게 이번 전시는 꽤 신선하게 다가왔고, 덕분에 영상이미지를 설치 작품 형태로 전달한다는 '현상'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 영상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크게 와 닿았다. (19.03.11)